어둑어둑해지고 여전히 우리는 궁전을 거닐 었다. 궁전 성벽 안에 빼곡히 차있는 공간들이 밤이 되니 또 저마다의 역할을 위해 불을 하나 둘 씩 밝힌다. 이 좁은 공간에 또 이 오래된 건물들을 어떻게 리모델링 했는지 제법 현대적인 느낌의 식당도 있었고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명 상표의 매장도 있었다. 예전 건물들은 허물어 버리고 천편일률적으로 상자를 쌓아 놓은 듯한, 때로는 촌스러운 색깔의 타일들을 벽면에 붙여 놓았단 우리 나라의 양옥들과는 다른 접근법이 와닿았다. 하긴 벌레도 잘 생기고 화재에도 약한 목조 건물이 많았던 우리의 건물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때로는 창조보다 변화 또는 발전이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걸 문득 느끼게 된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맞닥드린 Temple of Jupiter. 시간이 늦어 막 문을 닫고 있었는데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얼른 보고 가라고 문지기 분이 흔쾌히 기다려 주셨다. 이전에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해체되어 주변에 당시 건물의 일부분만 남아 뭐 딱히 대단하게 느껴진 건 없었지만 이 곳 사람들 참 친절하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여기 미국은 5분 전만 되도 정리하고 퇴근하기 바쁜데......
궁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여느 여염집 같은 곳이 뜻밖에 의미있는 공간인 경우가 자주 있었다. 문제는 그걸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는 거였지. 한 번은 여기 저기 기웃거리던 와중 한 담배 피우시던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여기 구경은 되는데 사진은 찍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얼굴에 물음표 한가득 그려내자 그 아주머니가 아주 시크하게 이 곳은 예전 귀족이 살 던 곳이었고 현재는 그냥 일반인이 살고 있으며 이 출입구 위의 조각들이 각 가문의 문장을 나타낸다고 알려주셨고 그제서야 우리는 사진기에 전원을 넣었다. 한창 그렇게 숨바꼭질 술래가 된 기분으로 이 곳 저 곳 범상치 않은 문 위의 조각들을 찾아보다가 문득 그래 이런 의미있는 것도 좋지만 그냥 이 분위기 고풍스러운 공간에 펄럭이는 빨래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 비록 조금은 어설프지만 한껏 멋을 낸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기타 연주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역시 놓칠 수 없는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성벽을 잠시 벗어나니 서 있는 Gregorios of Nin. 크로아티아의 주교 였다는 이 분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여 당시 교황청에 반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마 손에 들고 있는 저 책은 번역본이리라. 이 큰 동상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깃든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우리도 슬쩍. 이 동상은 이 전에는 궁전 안에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이 곳을 점령했을 당시 이 곳 밖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상이 바라보는 궁전 위에는 TV 안테나들이 비죽비죽 솟아나 있다. 예전에는 궁전이었을 지언정 지금은 달동네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