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의 기나긴 비행을 뒤로 하고 남반구로 날아와 익숙치 않은 12월의 여름 속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미처 시작되지 못한 겨울을 남겨두듯 일거리도 미국에 두고 왔었어야 했는데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조금은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첫번째 방문지 리콜레타 묘지. 아내도 첫 여행지가 하필이면 묘지라서 좀 개운치 않은 듯한 눈치였지만 막상 방문하자마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나도 묘지의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펼쳐지는 또다른 도시의 모습에 저 묘지 문 뒤에 남겨둔 일들로 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최고 부촌에 위치한 이 죽은 자들의 도시는 하나하나 때어놓아도 아름다운 조각이나 건축물로 장식된 무덤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나 있는 길들에는 관광객들이 때로는 숨바꼭질하듯 때로는 기차놀이를 하듯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 곳에 묘지를 잡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에서 왠만한 부나 명성을 가진자 아니면 (당연하겠지만) 들어오기 힘들다고 하며 아직까지도 이 곳에 묻히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은 기다려야한다고 한다. 막상 와 보면 더 들어올 자리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또 관리를 꾸준히 해 주어야할텐데 화려한 묘지 사이사이로 미처 관리를 하지 못한 무덤들도 눈에 띄긴했다. 이 묘지에 입장료를 받으면 아마도 관리가 좀 쉬워질텐데 우리가 방문할 때는 입장료가 없었다. 대신에 하루에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유료 투어가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만간 입장료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방문 계획이 있으시다면 한 번 확인해 보시기를.
이 곳에는 많은 아르헨티나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이 묻혀있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은 에바 페론 즉 에비타가 아닌가 싶다. 미로 같은 묘지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만 잘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거라고 했는데 우리는 생각보다는 힘들게 찾았다. 무덤 앞에 공간도 좁아서 전체적인 사진을 찍기에 화각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찾으면 여기는 에바 페론의 무덤임을 나타내는 푯말만 사진에서 보듯 대여섯개 (다른 무덤을 거의 없는게 대부분)가 있고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인들이 꽃아놓았을 꽃들도 여기 묻힌 사람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임을 알려준다.
오전에 구경을 마치고 나니 호텔 체크인을 할 시간이 되어서 방에 들어가니 묘지를 전체적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묘지와 도시의 경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명확하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시차 적응을 할겸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좀 할 겸 긴 해를 좀 피할 겸 호텔에서 휴식을 좀 취했다. 이제 이날 부터 2015년은 이 남반구에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