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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he lines

모비딕 (혹은 백경) - 허먼 멜빌

+ 11시 이후에 인터넷을 하지 않고 책을 보겠다는 다짐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지켜졌다. 비록 지난 2주간 뜻밖에 데드라인 들이 있어서 좀 무너지긴 했지만....... 날이 풀리니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글을 읽거나 쓰는 일에 게을러지지 말아야 겠다고 마음을 다 잡아 본다. 그래도 그 동안 성과가 있어서 두 권으로 이루어진 모비딕 (열린책들)을 다 읽어서 이 곳에 역시나 기록해 둔다. 보통 소설도 그렇고 심지어 논문 역시 꼼꼼하게 읽는 편이 아니라 굵은 중심 이야기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 번에는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꼼꼼하게 읽을 만큼 재미있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면서 왠지 어린이용 소설 문고에서 졸업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이용이 아닌 청소년 용 소설 문고에서 소설을 골라서 읽었는데 그 소설들이 바로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백경" 즉 모비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소설은 왠지 나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 같았고 그 당시에도 또 다른 성장의 시기에 꼭 원판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연인지 아니면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5권짜리로 제법 원판에 가까운 번역본으로 군대 제대 하고 (집에서 1년간 놀 때) 읽었고 역시 또 우연이지 아니면 그 대의 기억 때문인지 "백경" 역시 박사학위를 마치고 포닥 1년차에 읽게 되었네.

+ 어렸을 때 읽었을 때는 저 넓푸른 바다를 향해 고래를 잡으러 나아가는 포경선의 모험담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이 어린 나이에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 느낌을 바탕으로 썼던 독후감으로 학교에서 상도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박진감 넘치는 고래잡이 이야기는 저자의 고래에 대한 박학다식함에 파묻혀 버린 것 같았다. 주석까지 꼼꼼하게 달린 고래의 역사와 특징, 포경선에 대한 묘사 등등이 굉장히 자세하게 다루어져있었고 소설이라는 느낌 보다는 뭔가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을 읽은 듯 했다. 더불어 이 내용 그대로 번역했다가는 이걸 다 읽을 어린이들 역시 없겠다는 생각도 덩달아 했다. 대신에 저자 허먼 멜빌이 참 대단한 사람이었겠구나는 생각은 들더라. 실제로 저자는 포경선 선원 생활을 했고 그 생활이 이 소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묘사가 정말로 자세하고 현실감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있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소설로 멜빌은 부자가 되었겠지 쩝).

+ 그러고 보니 참 경험이란 건 멋진 게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해 본답시고 어리석은 선택도 하고 무리수도 두기도 하지만 그를 토대로 이런 세계적인 명작도 나오는 걸 보면 말이지. 하긴 나 조차도 2년 1개월의 군 생활을 가지고 10년 째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내 아내는 도대체 아직도 안 한 이야기가 있냐고 할 때도 있다.) 아마 박사 학위 과정도 마찬가지 아닐까? 2년 군생활로 10년 이야기하는데 5년 과정 동안 참 다들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직업의 특성 상 주변에 대부분이 박사들인데 서로 웃으며 자기 이야기 없는 박사가 어디 있겠냐고 다들 허탈하게 이야기 하곤 하는데 괜히 마음이 짠하다. 그 경험들이 나중에 다들 멋지게 기억되고 더 나은 내일로 꽃피워야 할텐데......이왕이면 멜빌처럼 사후에 말고 ㅋ

+ 한창 경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득 천명관의 "고래"가 떠올랐다. 같은 고래이야기인데 (물론 여기서 고래는 상징이다.) 이 소설에는 경험해 봤을 거라고는 그닥 생각이 들지 않는 이야기들의 펼쳐지는데 정말 흡입력이 장난 아니었다. 캠핑장에서 별 사진 찍으려고 하다가 자동차 실내등 켜 놓고 읽어내려 갈 정도 였으니. 정말 순수하게 상상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는 아마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뭔가 남는게 없다고나 할까? 뭔가 뼈대가 없는 것 같은....... 경험을 해봤다는 건 그 사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이야기일텐데 아마 그런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그에 비해 멜빌은 그 당시 미국 포경 산업에 대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고 거기에 자연의 경외감에 대한 이야기를 적절히 더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찾는 소설을 만드는데 성공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