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 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하이킹을 시작했고 또 4시까지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하루 의도치 않게 걷지 않았기 때문에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W trail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Lago Grey이 코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Grey 호수를 따라 걷는 코스인데 Grey 빙하를 볼 수 있는 대피소 까지 가서 1박을 하거나 아예 다음날 일정을 감안하여 다시 Paine Grande로 돌아와 1박을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했고 그마저도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Grey 빙하를 먼발치에서 볼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사전 조사에 의하면 Grey 빙하가 멋지기는 한데 다른 빙하에 비해 딱히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고. 그래서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Moreno 빙하 등을 보기로 했으니 우리 아쉬워하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면서 바쁘게 걸었다. 다행히 오후 부터 날씨가 조금씩 더 좋아졌고 바람도 잦아졌다. 간혹 비바람이 불어서 길 찾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글들을 많이 봤는데 사진에서 처럼 주홍빛으로 진하게 표시가 잘 되어 있었다. 문득 앞으로 여행도 이렇게 누군가가 잘 안내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잃어버리고 나니 그동안 머리 속에 넣어놓았던 수많은 지도와 지식들이 한꺼번에 뒤엉켜버려 몹시 당황했었는데 다행이도 아내가 재빠르게 잘 대처해 주어 바로 잡아준 것 같아 문득 더 고마웠다.
서두른 덕분에 1시간 만에 Grey 호수에 잿빛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그 잿빛위에 동동 떠내려오는 푸른 얼음 조각들로 우리가 빙하에서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빠른 사람들은 이미 대피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Grande Paine로 돌아오는 듯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지만 조금만 더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세 네번 되뇌이며 계속 걸어가니 저 멀리 드디어 Grey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대피소 근처에 가면 Grey 빙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나마나 이렇게 줌 렌즈로 당겨서 빙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켜켜이 쌓인 얼음이 흘러내리는 것을 거대한 바위가 막고 있는 듯한 모습이 신기했다. 그리고 저 바위의 주름들이 왠지 뜨거운 마그마가 갑자기 식어서 생긴 것처럼 보여서 거대한 에너지의 충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오는 길에 갈때는 서두르나 지나쳤던 야생화들을 관찰했다.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존재감을 뽐낸다. 그러고보니 옛날에는 꽃 사진들도 많이 찍곤 했는데 광각렌즈를 사고 가서는 조금 무심해졌구나.
Grande Paine에 돌아오니 어느새 봉우리를 덮고 있던 구름들이 걷혔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멋진 풍경들을 보며 짐 없이 초조하게 보낸 하루를 달래본다. 그리고 저녁 배에는 우리 짐이 꼭 실려있기를 기원했다.